조선 최고의 메모광 다산 정약용

기록은 남겨야 보존된다.

메모하지 않으면 기억의 저장고에서 깊은 잠에 빠지고 만다. 생각은 메모를 통해서만 싹을 틔운다. 메모의 습관은 꾸준한 연습 없이는 몸에 잘 붙지 않는다. 밥 먹듯이 메모하고, 숨 쉬듯이 메모해야 습관이 된다. 무심코 기록한 일기가 사료가 되고, 한 시대의 소중한 증언이 된다. 말은 항상 떠돌지만, 기록은 남기는 자를 통해서만 보존된다. 기록되는 순간 그것은 비로소 제 생명을 갖는다.

옛사람의 메모벽

옛사람의 메모벽은 자못 유난스럽다. 책을 읽다가 번뜩 떠오른 생각이 있으면 메모지에 옮겨 적었다. 바쁘면 책 여백에도 적었다. 생각이 달아날세라 급하게 메모했다. 이렇게 생각이 달아나기 전에 퍼뜩 적는 것을 질서(疾書)라고 한다. 질주(疾走)는 빨리 달린다는 뜻이고, 질서는 잽싸게 메모한다는 의미다. 성호 이익 선생은 자신의 저작에 일제히‘질서’란 말을 붙였다.『 시경질서(詩經疾書)』,『 논어질서(論語疾書)』같은 이름을 붙인 책이 여럿 있다. 두 그때그때 떠오른 생각을 메모해 두었다가, 나중에 정리해서 책으로 묶은 것이다.

훌륭한 책의 재료가 되는 메모

옛사람들의 책상 곁에는 메모지를 보관하는 상자가 따로 있었다. 메모가 쌓여갈수록 공부의 깊이도 더해갔다. 그러다가 틈이 나면 메모지를 꺼내 정리했다. 책 내용을 옮겨 적고 그 끝에 자신의 생각을 부연한 것도 있고, 스쳐가는 생각을 잊지 않으려고 끄적거린 것도 있다. 메모지를 분류하고, 주제별로 정리하면 그 자체로 한권의 훌륭한 책이 되었다.

메모를 모아 책을 펴낸 사람람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峯􆩦說)』이나 이익의『성호사설(星湖僿說)』같은 책들은 모두 독서 메모를 모 아 갈래 지워 정리한 책이다.박지원은 나이 들어 시력이 나빠 지는 바람에 읽을 수 없게 되자, 이를 버리며 몹시 안타까워 한 기록을 남겼다. 귀양 가 있던 허균은 제대로 된 먹거리 하나 없던 유배지에서 예 전 서울 있을 적에 맛나게 먹었던 요리를 하나하나 떠올려 메모해서『도문대작(屠門大嚼)」이란 음식 책을 남겼다.

조선 최고의 메모광 정약용

메모의 위력을 가장 잘 알았고, 효과적으로 활용한 사람은 다산 정약용이다. 그는 가히 조선 최고의 메모광이라 할만하다. 틈만 나면 적었고, 떠오르는대로 기록했다. 젊어서 정조에게 『시경』에 대한 강의를 들을 때 일이다. 정조는 날마다 엄청난 양의 숙제를 내줬다. 남들이 다 쩔쩔맬 때, 다산만 혼자 척척 해냈다. 그 비결은 평소의 메모 습관에 있었다. 그는 보통 때 주제별 공책을 만들어 놓고 필요한 내용을 메모하곤 했다. 임금이 어떤 질문을 던져도 공책 속에 답이 다 들어 있었다.

모두 기록하라

닭에 관한 내용을 옮겨 적어라. 닭을 기르면서 네가 보고 들은 내용도 빠짐없이 메모해라. 때때로 닭의 정경을 시로 묘사해 기록으로 남겨라. 그것들을 차례 지워 정리하면 훌륭한 한 권의 책이 될 것이다. 책의 이름은『계경(鷄經)』으로 붙여라”. 다산은 무슨 일을 하든 이런 방식으로 메모하고 기록하게 했다.

편집광 다산

다산은 조선 최고의 메모광이었을 뿐 아니라 편집광이었다. 어떤 정보든지 그의 손에 닿기만 하면 무질서하게 흩어졌던 자료들이 일목요연해졌다. 평소의 메모습관과 생각관리 훈련이 귀양지의 척박한 환경 속에서 놀랍게 꽃피운 것이다. 이런 메모와 정리의 혹독한 훈련을 통해 후에 제자들도 나름의 역량을 갖춘 훌륭한 학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 생각은 힘이 세다. 힘 센 생각은 메모에서 나온다. 머리를 믿지 말고, 손을 믿어라. 생각은 금세 달아난다. 미루지 말고 그때그때 적어라. 위대한 천재들의 놀라운 성취 속에는 언제나 예외 없이 메모의 습관이 있었다.